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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 이야기 이제는 추억이 된 힘들고 고달팠던 시절 고향의 오뉴월

글 : 박선희 기자

“기쁨과 슬픔이 엇바꿔 지나가도 추억은 지지 않는 내 삶의 메아리”
북한 가요의 한 구절이다. 사람들은 일상에서 벗어나 지나간 삶의 흔적을 찾아 추억여행을 떠난다. 앞다투어 여행을 떠나는 이 계절, 고향과 함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우리의 추억도 살포시 꺼내보자.

남한에서 맞은 첫 5월은 11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북한에서 들어보지 못했던 ‘가정의 달’ 덕분이다. 그즈음에는 지하철역, 버스 정류소, 동네 마트까지 온통 카네이션으로 세상이 빨갛게 보일 정도다. 가정의 달에는 ‘어버이날 선물추천’이 인터넷 검색어 1위다. 부모님과 스승, 자녀들에게 전해줄 선물을 고르는 사람들의 호기심이 컴퓨터 자판을 뜨겁게 달군다.

강제 동원의 시작 북한의 오뉴월은 기아와 노력 동원에 시달리는 힘들고 고달픈 계절이다. 솔직히 남한에 온 덕분에, 고향에서 보냈던 힘든 시절을 조금은 가볍게 펼쳐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북한은 남한보다 여름이 더디게 온다. 그중에도 개성을 비롯한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은 여름을 비교적 빨리 맞이하지만, 양강도를 비롯한 북부 내륙지역은 5월에도 쌀쌀한 기운이 감돈다.
북한에서 공식적인 위생월간은 3월과 4월이지만 쌀쌀한 날씨 때문에 5월이 되어야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도시에서는 하루하루가 청소 전투다. 새벽 6시가 되면 인민반장이 동원을 나오라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잠이 덜 깬 아버지는 아침부터 재수 없이 여자가 문을 두드린다고 혀를 차고, 부엌에서 밥을 짓던 엄마는 자는 아이들을 깨우며 괜스레 화를 낸다.
잠시 후 사람들은 부스스한 얼굴로 삽과 빗자루를 들고 인민반 동원에 나온다. 아버지가 없는 가정은 아이들이 대신 나오는 경우도 있다. 소학교에 다니는 쪼끄만 아이가 긴 삽을 끌고 나오는 모습을 보고 골목길에 앉아서 미적대던 사람들도 한바탕 웃으며 바지를 털고 일어난다. 새벽 동원이 끝나면 온 가족이 모여 밥을 먹는다. 5월의 특산물인 산나물무침에 참나물 김치, 염장 고추, 염장 오이가 식욕을 부추긴다. 밥을 먹으면서 재잘거리는 막내에게 엄한 눈길을 보내는 아버지, 그런 남편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어머니, 머리 푹 숙이고 밥만 먹는 맏이의 듬직한 잔등이 먼지로 얼룩진 유리 창문에 어렴풋이 비친다.
북한의 위생 월간 동원은 전국적으로 진행된다. 학생들은 오전 수업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작업복으로 갈아입는다. 교실 청소, 운동장 청소, 연구실 청소, 홍보물 게시판 청소까지 오후 내내 청소 노동에 시달린다.
이 시기에는 철길 동원, 도로 닦기, 강하천 정리 작업도 한창이다. 철길 동원은 큰 돌을 망치로 깨서 잘게 부수는 작업이다. 안전모는 고사하고 장갑도 없이 일하다 보니 돌을 내려치다가 망치에 손을 다치는 사고를 당하는 일이 다반사다.
햇볕에 그을린 얼굴 위로 흐르는 땀을 무심하게 쓱 닦아내고 다시 일에 열중하는 아이들, 중간 휴식 시간에는 철길 주변을 무리 지어 뛰어다니는 천진한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안쓰러워 콧날이 찡해진다. 일은 힘들지만, 함께 뛰놀 친구가 있고 코를 골며 곤히 잠들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시절이다.

내 울타리 안의 텃밭은 자본주의, 협동농장은 사회주의 예로부터 농사는 천하지대본이라 했다. 오늘날 북한에서의 농사는 삶과 죽음을 결정할 만큼 중요한 문제다. 그만큼 먹는 문제가 최우선이라는 얘기다. ‘고난의 행군’ 이후 국가의 배급제도가 끊기면서 북한 주민들은 뙈기밭 농사에 뛰어들었다. 도시에 사는 주민들은 봄이면 온 가족이 옥수수 쌀밥이 든 도시락을 허리에 차고 주변 산속으로 들어간다. 겨울에 땔감이 부족한 주민들이 몰래 산에서 나무를 베어가면, 기회를 보던 다른 사람들은 땅이 녹은 후 나무뿌리를 밧줄로 당겨 통째로 가져간다. 그렇게 민둥산이 된 곳은 호미와 갈퀴를 든 주민들로 북적인다. 무엇이든 땅에 심으면 먹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땅을 파는 주민들의 거친 숨소리가 산봉우리까지 울려 퍼진다.
5월이 되면 협동농장 일에 거의 전 주민이 동원된다. 그 가운데 강냉이(옥수수) 영양단지를 심는 일은 전적으로 학생들이 맡는다. 오죽하면 북한 영화에 ‘강냉이 영양단지는 학생 단지’라는 대사가 나올 정도겠는가.
모내기가 한창인 논에 들어선 아이들이 다리에 붙은 거머리를 보고 기겁해서 소리를 지르거나 울음을 터트린다. 익살스러운 친구들은 그런 모습이 재미있는지 겁 많은 친구에게 벌레를 보여주며 놀리기도 한다. 웃음소리와 울음소리가 논밭 여기저기서 뒤섞여 들려오고 배고픈 아이들은 농장원의 눈치를 보며 일하는 시늉만 낸다. 어른들도 강제로 나온 동원이라 마지못해 일한다.
옥수수와 보리가 한창 자라는 6월이면 개인 뙈기밭과 협동농장 농작물은 눈에 띄게 차이가 난다. 개인 밭 농작물은 튼튼하고 잘 자라지만, 협동농장 밭에는 농작물보다 잡초만 무성하다. 그래서 주민들은 개인 밭은 자본주의, 협동농장은 사회주의라고 비웃는다. 작년에는 코로나 방역으로 장마당 장사가 통제되면서 개인 뙈기밭 농사를 눈감아 주었다. 올해는 북한 당국에서 산림지에 뙈기밭 농사를 금지하는 조치가 내려졌다고 한다. 노동당의 지시를 어길 경우 국가산림 훼손죄로 처벌을 내린다고 하지만, 30년을 자급자족한 경험이 있는 북한 주민들은 올해 힘든 고비도 지혜롭게 이겨낼 것이다.

백두산보다 높은 보릿고개 남한에서 보릿고개는 이제 옛말이 된 지 오래다. 요즘 세상에 보릿고개가 웬 말이냐고 생각하겠지만 북한 주민들은 여전히 힘겹게 보릿고개를 넘기고 있다. 수확이 빠른 햇보리는 7월 말에 첫 수확을 한다. 그때까지 산나물을 채취하고 쑥을 뜯어 우려낸 다음 옥수수 가루에 버무려 먹으면서 보리 수확을 기다린다. 이제 한 달만 기다리면 된다는 희망이 보릿고개를 넘길 수 있다는 힘을 준다. 6월은 소년단 창립절 행사를 비롯해 6.25전쟁과 관련한 각종 정치행사로 마무리된다.
힘들고 고달팠던 고향의 오뉴월 추억을 줄줄 쓰다 보니 그 시절 고달픈 삶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추억은 지나간 기억을 전부 아름답게만 포장하지 않는다. 세월의 파도에 밀린 흐릿한 추억들을 가끔은 선명한 색깔로 혹은 희미한 흑백으로 열어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추억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죽을 만큼 아팠던 순간들도 시간이 지나면 위로라는 보상의 추억으로 남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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