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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착 이야기 인정받으려면 진정한 실력이 필요하다 미래종합건설 현명숙 철근공

글·사진 : 박선희 기자

내가 어떻게 바꿀 수 없는 지난 과거는 빨리 잊어야 한다. 아프고 시렸던 과거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그대로 머문다면 일상은 괴로움의 연속이다. 탈북민 현명숙 씨는 상처와 슬픔으로 얼룩진 과거를 숙명의 틀에 가두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한 주인공이다.

현명숙 씨는 건설 현장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할인 철근공, 15년 차 베테랑이다.

탈북민 현명숙(56세) 씨의 고향은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이 1907년 후치령에서 의병을 일으켜 여러 차례 항일전투에서 승전했던 함경남도 북청군이다. 남한에서 북청 하면 ‘북청물장수’를 연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오늘날 북한에서 북청은 사과로 유명한 고장이다.
올해로 남한 정착 16년 차인 명숙 씨는 미래종합건설 15년 차 철근공으로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다. 철근공은 건물, 다리, 댐 등의 건설 현장에서 철근을 자르고 구부려 콘크리트를 칠 곳에 넣어 고정하는 일을 한다. 철근공은 건설 현장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할을 맡은 기술자로 꼽힌다.

베테랑 철근공의 성장기 보통 건설 현장에서 철근공으로 일한다고 하면 탄탄한 근육질의 건장한 남자를 떠올린다. 철근공은 무거운 철근을 들어 나르고 철사로 연결해주는 힘든 작업인 만큼 현장에서 일하는 여성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명숙 씨가 작업 현장에서 여성 철근공은 자신뿐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명숙 씨는 2007년 남한에 정착했다. 40살에 시작된 남한살이는 녹록지 않았다. 당시에는 자격증이나 기술을 배워 전문직으로 일할 생각은 감히 못 했다고 한다.
어서 빨리 돈을 벌어 북한에 남겨진 가족을 데려올 생각뿐이어서 우선 당장 돈이 들어오는 시간제 일을 선택했다. 처음에는 식당에서 시간제로 일을 하다가 지인 소개로 주유소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최저시급을 받으면서 일하다가는 가족을 데려올 돈을 마련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이르렀어요. 그때 마침 주유소에서 함께 일하던 지인의 소개로 건설일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지금까지 15년을 한 우물을 파게 되었습니다.”
첫날 작업이 끝나고 장갑을 벗었더니 손가락 마디마디가 쑤시고 손바닥은 온통 물집 투성이였다. 허리는 물론이거니와 무릎을 굽히기 힘들 정도로 통증이 밀려왔다.
‘내가 과연 견딜 수 있을까?’ 하는 고민도 잠시 고향에 남아 있는 가족들 얼굴이 떠올랐고, 명숙 씨는 부르튼 열 손가락과 손바닥에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인 채 다시 현장으로 향했다. 열흘 정도 시간이 지나자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이면서 일이 차츰 손에 익었다.
건설 현장에서 철근공들은 5~8명이 한 조로 움직인다. 막상 작업에 들어가면 각자 맡은 구역에서 묵묵히 일하는데, 서툴면서 꾀까지 부리면 바로 결과물로 나타난다.
“처음 접해보는 작업장에서 잘못 엮은 철사를 다시 풀고 그러다 보니, 작업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반장이 일을 제대로 하라고 큰소리를 치죠. 그때마다 이런 일이 처음이라 그런다는 말은 건설 현장에서 통하지 않았어요.”
명숙 씨는 그런 상황에서 같이 화를 내고 상처받기보다, 이를 악물고 더욱 열심히 일에만 집중했다. 일하러 왔으면 일을 잘하는 것만이 인정받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불만도 표출하지 않고 안전모를 푹 눌러쓴 채 묵묵히 현장 일에만 몰두했다. 일이 점차 익숙해질 무렵, 말투가 다르다고 느낀 동료들이 고향이 어디냐며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북한에서 왔다고 당당히 대답하자, 동료들은 북한도 우리와 같은 민족이라며 동포가 왔다고 반가워했다. 겉보기에는 말투도 거칠고 무뚝뚝한 사람들이었지만 북한 출신이라는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손을 내밀며 친근감을 드러내 주는 게 여간 고마운 게 아니었다.
그녀는 “솔직히 처음에는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거칠고 싸움도 많이 하는 사람들이라는 선입견이 있었어요. 그러나 막상 현장에서 겪어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주변 동료들의 아픔도 헤아려주며, 기꺼이 도와주려고 애쓰는 정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북한 출신이라는 사실을 공개한 뒤 오히려 동료들과 유대감은 더 깊어졌다. 북한에서 왔다고 차별하는 사람도 없고, 일한 만큼의 정당한 보수도 받았다. 15년 전 받았던 보수는 월 300만 원이었는데 지금은 500만 원이 넘는다. 그는 작업장에서 남자 동료들과 농담이나 작업과 관련이 없는 말은 거의 하지 않는다. 여성이 드문 건설 현장 특성에 맞게 적절한 선을 지키며 동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철근을 결속하는 일은 자신의 할당량을 끝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조원들의 작업이 같은 시간에 마무리되어야 하루 작업이 끝난다. 과거에는 조원들이 할당량을 끝내고 일이 서툰 명숙 씨를 도와주어야 제시간에 마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동료들의 도움이 없이도 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을 만큼 숙련되어 있다.
과정이 없는 결과는 없다. 그는 건설 현장에서 쓰는 공구나 자재 이름들을 숙지할 때까지 외우고, 작업이 끝나도 현장에 남아 철사를 빠르고 단단하게 묶는 방법을 숙련될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해서 연습했다. 지금은 작업이 조금 늦어져도 주변에서 명숙 씨를 걱정하는 동료는 없다. 베테랑 철근공인 그녀의 일솜씨를 익히 알기 때문이다.
“건설 현장에서 일하면서 좋은 점은 일한 만큼의 합당한 보수를 받는 점이지만, 그보다도 더 힘이 나는 것은 동료들로부터 내가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말로만 제발 나를 인정해달라고 구걸했다면 오히려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았을 겁니다. 15년간의 피나는 노력과 인내, 묵묵히 일에만 집중했던 성실함이 마침내 빛을 보는 것 같아서 행복합니다.”

건설 현장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명숙 씨의 성실함을 인정한 동료들은 그가 북한 출신임을 밝혔음에도 오히려 더 반가워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일하고 있다.

인간만사 새옹지마 그녀는 10년 전 건설 현장에서 함께 철근공으로 일하던 남한 출신 남성과 결혼했다. 남편은 명숙 씨에게 현장 일도 가르쳐주고 남한 정착 과정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사소한 것들도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차분한 성격을 소유한 남편은 아내를 귀하게 여기고 자상하게 보살펴주었다.
그렇게 서로 의지하며 부부로 살아가던 어느 날, 남편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졌다. 이 병은 심장 동맥 경화로 혈액 순환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서 심장 근육에 괴사가 일어나는 병으로 제때 발견하지 못하면 목숨을 잃게 되는 병이다. 그녀의 남편은 2019년부터 현재까지 두 번의 심근경색으로 목숨을 잃을 뻔했다. 다행히 명숙 씨가 그때마다 일찍 발견해 병원으로 후송하면서 위험한 고비를 넘길 수 있었지만 그 후유증으로 이제 현장에서 일은 하지 못하고 있다.
“인간만사 새옹지마란 고사성어가 생각납니다. 남한 정착 초기, 남편은 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면서 도움을 줬어요. 지금은 받은 것만큼 갚는다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돈을 벌지 못한다고, 거동이 예전과 다르다고 외면할 수 없어요. 가족은 좋을 때만 같이하고 불리하면 외면해도 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에게 가족은 인생길을 함께 가는 동반자이다. 물론 지워지지 않는 아픈 추억도 함께 스며 있다. 명숙 씨는 북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플라스틱 수지 공장에서 일용 생산직 근로자로 일했다. 20대 중반에 중매로 고원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와 결혼했지만, ‘고난의 행군’이 한창이던 1990년대 중반 남편은 갱 붕괴 사고로 사망했다.

기어서라도 남한으로 가리라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식량난에 고생하시던 어머니도 굶어서 돌아가셨다. 그녀는 어머니와 남편의 무덤 앞에서 희망이 없는 북한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결심은 곧 실천으로 이어져 1998년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북했다. 첫 탈북은 성공했지만, 4년 후 중국 사람의 밀고로 공안에게 체포되어 북송되었다. 노동단련대에서 2년 동안 강제 노동의 형을 마치고 사회에 나온 그녀는 두 번째 탈북을 감행했고 다행히 국경경비대의 감시를 피해 무사히 중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도감도 잠시, 2년 후 다시 북송이라는 악몽을 마주했다. “중국에서 남한 드라마를 보면서 대한민국에 올 결심을 했어요. 중국에서는 배불리 먹을 수는 있었지만, 신분이 보장되지 않아 늘 불안했습니다. 남한행을 결심하고 중국에 거주하는 탈북민 여럿이 모여 이동하다가 몽골 국경에서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또다시 북송되었습니다.”라며 당시의 절망적인 상황을 회상했다.
두 번째 북송으로 인한 처벌은 가혹했다. 북한에서 가장 악명 높은 ‘증산 교화소’에서 3년간 징역살이를 했다. “남한에서 탈북민들이 북한 교화소 실상을 고발하는 영상을 봤습니다. 하지만 실제 교화소 생활은 감히 인간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가혹하고 비참합니다. 말로 다 형언할 수 없죠. 이 지옥에서 살아남아 기어서라도 남한으로 가겠다는 의지로 버텼습니다. 두 번의 북송과 세 번의 탈북 끝에 2007년 마침내 대한민국에 입국했어요.”

힘들게 이룬 행복! 낭비는 금물! 첫인상에도 ‘나는 착한 사람입니다’라고 얼굴에 쓰여 있는 것처럼 미소가 아름다운 현명숙 씨는 아담한 체격에 동그란 얼굴, 까만 눈매가 인상적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깜찍한 외모 덕분에 동네 사람들로부터 사과처럼 생겼다는 말을 종종 들으며 자랐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취재하는 동안 내내 차분한 미소를 띠며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갔다.
그녀는 중년의 나이에 남한 정착을 시작한 만큼 허투루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고 말했다. 일이 힘들다고 그만두거나, 쉬운 일만 찾는다면 성공적인 남한 정착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남한 사람들과 잘 어울려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진실하고 솔직한 마음으로 다가가는 것이야말로 남한 정착의 지름길이라는 조언도 빼놓지 않았다. 또한 성실과 노력을 통해 자신의 진면모를 보여주기도 전에 인정받기를 바라는 것은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는 것과 같다며, 당당하게 실력으로 인정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명숙 씨는 앞으로도 10년 이상을 건설 현장에서 일할 계획이다. 그동안 현장에서 쌓은 15년의 경험은 결코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그녀만의 귀중한 ‘무형의 자산’이다. 열심히 일해서 내 손으로 작은 집 한 칸이라는 ‘유형의 자산’을 마련해 노후를 편하게 보내는 것이 그녀의 꿈이라며 수줍게 털어놓는다. 비록 체구는 작지만, 그동안 넘기 힘든 삶의 질곡에도 굴하지 않고 견뎌온 그녀의 삶의 여정을 볼 때 능히 이룰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는 건 나만의 무리한 기대는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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