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팝업레이어 알림

팝업레이어 알림이 없습니다.

동포사랑

E-BOOK 보기

정착 이야기 오뚝이 정신 365일 하나약국 이하나 대표

글 : 허옥희 기자l사진 : 허영철 기자

남한에서 50대에 약사 자격 면허를 취득하고 자신의 약국을 경영하는 이하나 씨. 북한에서 약사로 근무했다는 경력으로 된 건 아니다. 남부러워하는 그의 약사 행로에는 남 못지않은, 어쩌면 더 처절한 고군분투의 노력이 스며 있다.

‘365 하나약국’은 공공 심야 약국이다.
1년 내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침 8시 문을 열고 다음 날 새벽 1시에 문을 닫는다. 약국 근처는 공장 노동자들의 주택지구다. 출퇴근 이후 시간을 이용하여 병원과 약국을 찾는다. 이들의 요구에 맞춰 하나 씨는 눈이 와도, 비가 와도 언제나 한결같이 첫 지하철을 타고 약국 문을 연다.

이하나 약사는 오뚝이 정신으로 삶의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엄마의 고향 서울 “모든 것은 거기서 시작되었지요. 인생의 곡절이요.” 이하나 약사의 첫 이야기이다. 서울 태생인 하나 씨의 어머니는 6.25 당시 여고생으로 무료로 공부시켜 준다는 북한의 감언이설에 속아 혼자 북으로 향했다. 전쟁이 끝나자 배움의 열정 하나로 평양의학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그러나 무남독녀 하나 씨가 10대였을 무렵, 고향이 서울이란 이유로 계급적으로 믿지 못할 사람으로 분류되어 북쪽으로 추방되었다. 고행의 시작이었다. 어머니는 의사에서 탄을 캐는 광부가 되었고 하나 씨는 발가락이 나온 편리화를 신고 십 리가 넘는 시골길을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꿈에서나 존재하던 어머니의 고향 서울과 연이 닿은 건 1998년이었다. 노모가 살아계시다는 연락을 받은 하나 씨의 어머니는 평생을 눌러온 그리움을 참지 못했다.
가족을 만나는 길에서 죽겠다는 결심으로 어머니가 길을 떠났다. 몇 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는 어머니를 찾아 하나 씨는 9살 난 맏딸을 데리고 두만강을 건넜다. 하나 씨의 어머니는 남쪽의 가족이 마련해 준 안가에 있었다. 어머니의 안전을 확인하고 나니 이번에는 북에 남겨둔 3살 어린 딸 생각이 못 견디게 가슴을 후볐다. 강이 얼기를 기다렸다. 다시 돌아가겠다는 하나 씨의 결단을 들은 어머니는 두 팔로 막아 나섰다. 손녀도 마음에 걸리지만 당장 딸의 목숨이 먼저였다.
한밤중 어머니에게 딸을 부탁하는 편지를 남기고 혼자 안가를 나섰다. 무작정 넘은 강가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경비대의 총구였다. 북방의 1월, 대한이 얼어 죽는다는 소한 날이었다. 눈발이 하얗게 날리던 강가에서 하나 씨는 입은 옷마저 빼앗기고 보위부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보위부 감옥에서 보낸 1년 가까운 시간, 매일 이어진 매질과 취조에 살아서 나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서울 출신의 어머니가 중국으로 갔으니 한국행으로 짐작하고 집요하게 심문했다. 밤에도 혹시 입 밖으로 어머니가 계신 곳을 대는 건 아닐까 두려움에 시달려 잠결에도 소스라쳤다. 혁명역사 교과서(북한의 교과서)에 나온 항일투사처럼 혀를 끊어야만 할까 고심하던 그때,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발표되었다. 남북관계가 화해의 분위기로 바뀌고 남쪽 출신이 억울한 점을 없게 하라는 김정일의 ‘3.13 특별 지시’가 내려졌다. 덕분에 생각지도 못한 사면을 받고 풀려난 하나 씨는 그날을 인생의 기적이라고 말한다. 헤어진 지 1년이 못되었지만 어린 딸은 달라진 엄마를 알아보지 못했다. 처음 보는 이를 대하듯 불러도 오지 않는 딸을 무릎에 앉히고 사진첩을 펼쳤다. 가족이 찍은 사진 앞에서 물었다.
“ㅇㅇ아, 이건 누구니?”
“나, 언니, 아빠, 이건 엄마야.”
사진을 들여다보고 다시 엄마를 바라보던 딸이 그제야 “엄마”를 부르며 울음을 터뜨렸다. 딸은 그날부터 한시도 엄마 옆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작은딸과 함께하자이번에는 떠나보낸 엄마와 맏딸의 생사가 자나 깨나 걱정이었다. 손녀와 함께 한국에 잘 정착하였다는 어머니의 연락이 왔다.
“모녀가 대를 이어 갈라져 살아야 할까.” 어머니의 일생을 곁에서 지켜보며 그리움의 비극을 누구보다 잘 아는 하나 씨는 결국 1년 후 다시 운명에 도전했다. 목숨처럼 소중한 딸을 업고 얼음이 떠다니는 강을 무사히 넘어 한국행 길에 올랐다.

배우는 고통은 잠깐이지만 못 배운 고통은 평생 갑니다 북한의 약사 자격은 어디서도 통하지 않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굶어 죽을 염려가 없었다. 슈퍼에서 비품을 정리하는 일이 하나 씨가 맡은 일이었다. 어머니는 약학대학에 다시 입학하여 면허를 취득하라고 권고했지만 40대 중반의 나이에 20대 친구들과 경쟁할 자신이 없었다고 한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지만 약사와 슈퍼 일은 전혀 다른 세계였다. 마치 다른 사람의 허울을 쓴 것 같았다. 자신에게 맞는 옷을 입어야 했다. 어느 날 출근길 버스 안에서 “배우는 고통은 잠깐이지만 못 배운 고통은 평생 갑니다”라고 쓴 글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래, 다시 시작하는 거야.”
그러나 배움의 길도 쉽지 않았다. 결심한다고 대학이 그를 반겨준 건 아니다. 북한대학 졸업장을 가져오라는 어느 대학 입학처의 설명을 듣고 절망했다.
“생사도 담보하지 못하는데 졸업장을 어떻게 가져옵니까?”
절규해 봐도 넘을 수 없는 법의 울타리 앞에 예외는 없었다. 실망을 거듭하며 이곳저곳, 또 다른 대학을 찾아 나서던 그때, 삼육대학교에서 배움의 문을 열어주었다. 실향민 1세대들이 세운 대학이었다. 소중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남보다 몇 곱절 노력하자고 결심했다. 대학에 입학하자 첫 강의부터 낯선 외래어와 영어 강의에 숨이 막혔다. 영어학원에 등록하고 A,B,C부터 배워나갔다. 강의를 마치면 아르바이트가 기다렸다. 두 아이를 키우며 대학을 마칠 때까지 4년, 한 푼도 아쉬운 그는 점심을 거르고 라면으로 저녁을 대신하기 일쑤였다. 대학교 1학년 때 600원이었던 라면은 2학년에 올라가자 1,000원이 되었다. 그 값을 잊지 못하는 건 남다른 그의 기억력 때문만이 아니다.
대학을 졸업했지만 더 큰 일이 앞에 있었다.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약사면허시험의 벽을 넘지 못했다. 금싸라기 같은 그 시간이 아까웠던 하나 씨는 북한대학원에서 박사 과정 공부를 시작했다. 박사논문과 국가고시 시험을 함께 준비하며 1년, 2년, 시간이 흘렀다. 결국 약사면허를 받던 그해 이하나 씨는 박사학위도 함께 취득했다. 나이 쉰에 이루어낸 그의 인간 승리였다.

지역 주민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비결은 이하나 약사의 친절한 설명과 함께 베푸는 마음이다.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이하나 씨의 카톡명은 ‘오뚜기’이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그것만으로 그의 삶의 태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약사 면허는 시작에 불과했다. 고군분투하면서 동업으로 시작한 약국은 1년 만에 문을 닫아야 했다. 재개발을 앞둔 지역에 주민들이 떠나버리자 약국에는 파리만 날렸다. 가게 운영 경험이 없어 위치 선정에서 실패한 것이다.
산더미 같은 대출을 안고 있던 하나 씨는 약국 문을 닫고 출발점으로 돌아갔다. 첫 번째 실패의 경험을 살려 영등포의 대로변, 새로 짓는 건물에 입주 계약을 했다. 성공을 보장한다는 건물주의 말을 믿었으나 계약금 2천만 원이 사라질 때까지 병원이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두 번째 선택도 실패였다.
2016년 11월 29일 지금의 ‘365 하나약국’을 개업하게 되었다. 집에서 두 시간 거리지만 여러 기업의 생산라인이 있어 주민이 밀집한 곳이었다. 명절날, 휴일을 가리지 않고 1년 365일 문을 연다는 건 사실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하나 씨는 말한다. 그런 그를 채찍질한 건 나란히 자리한 병원이다. 병원 역시 ‘365 심야병원’이다. 약국과 병원은 언제나 함께 열려 있다. 하루도 쉬지 않고 병원을 지키는 깡마른 의사를 보며 이하나 씨는 다짐한다.
‘한국에서 태어나 의사가 되었어도 저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내가 질 수야 없지.’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말이 있죠. 지나온 삶을 돌아보니 죽을 각오를 했을 때 살았고 살고자 했을 때 죽을 역경에 처했습니다. 그런 각오를 하니 집에서 먼 출근 거리, 늦은 시간, 자금 부족 등 여러 불리함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일어나기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기자의 말에 대한 대답이다.
심야 약국이어서 저녁 시간을 교대해 주는 약사가 있지만 1주일에 두 번은 하나 씨가 맡는다. 교대 약사에게 쉬는 날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새벽 1시, 일이 끝나면 한쪽에 놓인 의자에서 쪽잠을 청한다. 의자를 가리키며 “이 의자가 내 키에 딱 맞아요.”라며 밝게 웃는 이 약사 앞에서 할 말을 잊는다.
동경의 눈길을 받는 이하나 약사의 오늘은 남다른 그의 끈기와 오기가 빚어낸 모습이다. 명암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보이는 모습 속에 감추어진, 그가 헤쳐온 보이지 않는 삶의 무게가 느껴졌다.

국민의 한 사람 처음 지역에서 약국을 여니 그의 북한 사투리를 들은 손님들이 의아한 눈길을 보냈다. 외국인 노동자도 많고 중국 조선족도 많은 지역이다. 그 어렵다는 약학대학을 나온 약사의 사투리는 어떤 이들에게는 친근함을, 또 다른 이에게는 미심쩍은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약국에는 나이 성별을 불문하고 많은 사람이 온다. 지역 주민이라 한두 번 보고 말 사이가 아니다. 늘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비결은 약에 대한 친절한 설명과 함께 베푸는 마음이라고 한다.
마스크 대란이 일어난 시절, 요구대로 팔아주지 않는다고 보건소에 민원을 넣는 사람도 있었다. “이상한 중국말 하는 아줌마”라는 민원에도 그의 사투리는 여전하다. 지금은 누구나 365일 약국을 지키는 그가 북한에서 온 약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의 피나는 열정에 대한 보답인 듯 약국에는 여러 상장과 상패가 있다. 대통령 표창장(2014년)도 있고 약학기술인상(2021년), 제6회 자랑스러운 대한약사상(2019년), 그리고 올해 받은 약국경영대상(2023년)도 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 당당히 살아가는 모습이다. “해마다 세금을 낼 때면 긍지를 느끼죠. 제가 받은 정착지원금보다 훨씬 더 내고 있으니까요.” 이야기를 마치며 이하나 씨가 한 말이다.

365일 약국을 지키는 이하나 약사는 이제 지역에서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개인정보수집·이용에 대한 동의

- 개인정보의 수집 및 이용목적 : 동포사랑 웹진 메일 발송
- 수집하는 개인정보 항목 : 필수항목 : 이메일
- 개인정보 보유·이용기간 : 개인정보 수집 목적 달성시 까지, 고객구독 취소시 즉시파기 ※ 귀하께서는 본 안내에 따른 개인정보 수집․이용에 대하여 동의를 거부하실 권리가 있습니다. 다만, 개인정보의 수집‧이용에 동의를 거부하시는 경우 동포사랑 웹진을 메일을 통해 받으실 수 없습니다.